뮤지컬 <향란晑乱 >

인간의 존엄성과 진정한 독립을 말하다


<향란> 이진원 작가, 강소연 작곡가 

 

 

글로컬 뮤지컬 라이브 시즌7의 쇼케이스 작품 중 하나로 <향란>이 선정되었다. 일제강점기 ‘최초의 단발랑’으로 불린 실존 인물 강향란이 이야기의 모티브다. 꼼꼼한 자료조사와 동시대적인 상상력을 바탕으로 주인공 ‘향란’이 탄생했다. 이진원 작가, 강소연 작곡가는 인터뷰 내내 함께 밝은 에너지를 전해 주었다.

 

사람으로 살기 위한 향란의 발걸음

 

일제강점기 신여성 ‘강향란’에 관한 작품을 구상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 

이진원 2018년경 조선의 섹슈얼리티를 다룬 책 『조선의 퀴어』에서 “에로 그로”라는 말을 발견했다. <향란>의 넘버에도 “에로 그로 넌센스”라는 제목을 붙였는데, “그로”는 그로테스크를 줄인 말이다. 일제강점기 때부터 줄임말을 썼다니, 재밌고 신박하다고 생각했다. 호기심에 이끌려 책을 읽다가 거기에 나온 ‘조선 최초의 단발 여성’ 강향란을 알게 됐다. 강향란은 1920년대 신문지상에 보도될 만큼 화제의 인물이었다. 한남 권번 기생이었던 그가 실연의 아픔을 겪고 머리를 자른 뒤 배화여학교에서 퇴학을 당한다. 이후 남자 옷을 입고 남자들만 다니는 강습소에 들어가겠다고 선언한다. 기사의 파급력이 얼마나 컸는지, 강향란에게 감명받아 머리카락을 자르고 강습소에 들어간 여성이 있을 정도였다. 

 

주인공 ‘향란’은 강향란뿐만 아니라 당대 신여성들의 집합체 같은 캐릭터로 보인다. 

이진원 그렇다. 정말 파란만장한 삶을 사신 분인데, 짧은 시간에 인물을 명확하게 보여줘야 했기 때문에 몇 가지 사실을 가져와 가공하거나 극대화했다. 극에서는 향란이 조선을 떠나는 데까지만 나오지만, 실제로는 유학을 갔다 와서 여성 인권과 아동복지를 위해 많은 활동을 했다. 당시 백두산 기자가 강향란에 관한 기사를 썼는데, 그게 왠지 제3자가 아니라 본인이 자기소개를 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당대 전형적인 남성 기자의 시선이라기보다는, 어느 정도 애정이 담겨있는 글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상을 더해, 향란이 백두산이라는 필명으로 신문에 글을 기고하는 내용을 넣었다. 

 

향란이 글 다음에 배우게 되는 대상으로 왜 시계를 선택했나?
이진원 김상욱 물리학자가 이런 말을 했다. ‘지구상에서 평등한 게 딱 하나 있는데 그게 바로 시간’이라고. 나도 똑같은 생각을 한 적이 있어서 놀랐다. 모든 사람한테 평등하게 주어지는 시간의 존재를 생각하면서, 향란이 시계를 배운다는 설정을 넣었다. 대사로도 썼듯이 세상은 톱니바퀴처럼 유기적으로 돌아간다. 톱니 하나만 빠져도 시계는 움직이지 않는다. 그처럼 사람도 함께 살아가야 하고, 같이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동시대 관객이 향란의 이야기에 공감할 수 있는 지점은 무엇인가?
이진원 아직 우리 사회에 임금차별과 유리천장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나. <향란>에 조선인 여성들의 임금이 “일본 노동자의 4분의 1, 남성 노동자의 2분의 1”이라는 대사가 있다. 100년 전 조선 여성들은 민족 차별에 성차별까지 이중 차별을 당해야 했다. 유리천장을 뚫는 향란의 정신을 보여주고 싶어, 그가 지붕 위에서 고공 시위하는 장면을 썼다. 그런데 놀랍게도 1930년대 강주룡이라는 여성 노동운동가가 12미터 을밀대 지붕에서 고공 농성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향란이 공장 지붕 위에 올라가서 외친 대사가 그분이 실제로 하신 말씀이다. 강주룡과 강향란의 주체적인 삶을 통해, 지금까지 대두되고 있는 사회 문제들과 의존적으로 살아온 나 자신을 돌아보며 많이 반성했다. 

 

 

무대화를 향한 길을 찾아

 

주변 인물로 윤호와 김 선생이 등장한다. 듀엣곡에서 두 사람이 대립적인 가치관을 드러내다가 같은 가사로 끝을 맺는 게 인상적이다. 똑같은 말속에 서로 다른 마음이 담겨있다.
이진원 그게 제일 힘들게 쓴 가사 중 하나다. 백두산 기자의 글에 강향란이 야학을 운영하는 ‘김 선생’을 만났다는 기록이 나온다. 향란만 놓고 보면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성이 잘 드러나지 않아서, 클리셰라 하더라도 독립운동 설정을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멘토링을 받을 때 김 선생과 윤호를 한 인물로 합치라는 피드백을 많이 들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서로 같은 곳을 바라본다고 하더라도 각자 삶의 태도가 너무 다르기 때문에 두 캐릭터를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김 선생은 우리가 보통 상상할 수 있는 독립운동가라면, 윤호는 친일파 아버지를 미워하는 동시에 독립운동을 하다가 희생된 형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인물이다. 형을 그리워하는 윤호의 인간적인 면모를 부각하기 위해 작곡가님과 많이 상의했고, 정말 좋은 넘버가 나왔다. 
강소연 김 선생과 윤호가 등장할 땐 과거에 머무르는 장면이 많아서, 윤호가 형을 그리워하는 장면을 만들면 이야기가 진전하는 데에 방해가 되지는 않을지 걱정했다. 뮤지컬에서는 사건이 앞으로 계속 나아가야 하는데, 전개가 멈춰있다는 인상을 줄까 봐 고민했다. 막상 만들어 보니 윤호 캐릭터가 더 잘 드러났다. 

 

<향란>의 음악적 콘셉트는 어떻게 정했나?
강소연 배경이 일제강점기라 넘버에 시대성을 담아내야 하나 고민했다. 특정 시대가 떠오르는 곡을 쓰려다 보면 한계에 부딪힐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시대성보다는 드라마와 가사의 느낌에 충실했더니 작업이 좀 더 수월하게 풀렸다. 강습소 학생들과 윤호, 향란이 같이 부르는 네 번째 넘버 “돌고 도는”은 공장 노동자들이 부르는 아홉 번째 넘버로 리프라이즈(reprise) 된다. 가사는 그대로 두고 달라진 상황에 맞게 장조에서 단조로 바꿨다. 악기 구성도 초반에는 가볍지만, 뒤로 갈수록 점점 무겁게 편곡했다. 건반, 기타, 베이스, 드럼 등 밴드 사운드로 곡을 구성했는데 나중엔 악기를 좀 더 추가하고 싶다. 어쿠스틱 기타가 주는 가벼운 매력과 일렉 기타가 주는 무거운 느낌을 더 뚜렷하게 대비시켜 사용할 계획이다.

 

현재 버전에 이르기까지 이야기 구조나 음악 구성에서 어떤 변화가 있었나?
이진원 처음엔 이야기가 복잡하다는 피드백을 많이 받았다. 주인공 향란을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김 선생과 윤호에 관한 정보가 쏟아지면, 관객이 어렵게 느낄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래서 향란이란 인물을 먼저 쭉 보여주고, 그다음 김 선생과 윤호를 보여주는 식으로 구성을 바꿨다. 그 과정에서 향란과 윤호의 솔로곡이 생기는 등 넘버도 많이 바뀌었다. 향란이 가장 잘 보일 수 있도록 4번 넘버였던 곡을 오프닝으로 가져가기도 했다. 
강소연 두 번째 넘버는 향란이 즐겁게 글을 배우는 과정에서 부르는 밝고 가벼운 느낌의 곡이다. 이게 원래 4번 넘버였다가 앞으로 당겨졌는데, 다소 무거운 분위기인 첫 번째 곡과의 간극이 크게 느껴졌다. 그래서 반주 구성과 패턴을 조정했다. 첫 곡이랑 끝 곡이 너무 달라서 고민이었는데, 수정 후엔 오프닝넘버가 엔딩에서 반복되어 구조적으로 더 좋아진 듯하다. 또 초기 대본엔 실화가 많이 들어가서 다큐멘터리 같은 느낌이 없지 않았다. 실제 이야기를 과감하게 덜어내고 작가님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에 집중했더니 대본이 더 깔끔해졌다.

 

 

 

언젠가 있을 본 공연에 앞서 어떤 점을 보완하고 싶나?
강소연 오디오북을 만들고 나니 이음새에서 부족한 부분들이 보였다. 대본으로 볼 땐 훅훅 넘어갔지만, 무대화를 고려하면 어색한 지점들이 있는 듯하다. 연결 부분을 더 세심히 살피고, 이를 어떻게 수정할지 배우나 연출부의 시선으로 고민해 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향란이 지붕 위에 올라 투쟁하는 장면에선, 현악기의 풍성한 사운드를 들여와 좀 더 웅장한 분위기를 내보고 싶다. 
이진원 지금 1막이 30분밖에 안 된다. 향란이 에피소드와 김 선생, 윤호의 전사를 추가해서 1막을 더 늘릴 필요가 있다. 2막의 대사랑 가사 중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을 발견했다. 앞에서부터 톤을 차근차근 쌓아갔으면 좋았을 텐데, 너무 감정이 앞서 쓴 가사들이 꽤 있다.

 

앞으로 어떤 작업을 이어 나갈지 기대된다. 향후 계획이 있다면?
강소연 그저 열심히 곡을 쓰고 있을 것이다. 
이진원 우리가 같이 쓴 작품이 많다. 여성 과학자 이야기, 천재 수학자 남성 3인극, 유튜브 하는 할머니 5인극 등등. 언젠가 이것들을 대학로 무대에 꼭 올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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