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컬 뮤지컬 라이브 시즌7 어바웃

창작 특강1
WHO’S NEXT? 
일시: 2022년 9월 28일 오후 4시 20분~5시 50분
장소: 한국콘텐츠진흥원 콘텐츠인재캠퍼스 303호
강사: 고성일 '불과 얼음' 대표

 

 

뮤지컬 창작소 ‘불과 얼음’의 고성일 대표는 뉴욕대에서 뮤지컬을 공부하며, 한국에서 뮤지컬 창작자 양성 프로그램을 만들겠다는 포부를 갖게 됐다. 귀국 후 3년간 해마다 뮤지컬 작곡·작사 교육 프로그램 워크숍을 열었고, 그때 만난 이들과 함께 2006년 ‘불과 얼음’을 창단했다. 당시만 해도 창작자와 제작사가 계약서를 쓰는 건 어색한 일이었다. 수많은 선배 예술가의 노력으로 지금의 뮤지컬 제작 환경이 만들어졌다. 고성일 대표는 인류 역사를 알아야, 그 열매를 먹고 있는 창작자들이 예술사의 흐름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알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서구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성경 이야기와 그리스·로마 시대를 짚고, 현대 뮤지컬의 뿌리를 탐색하는 시간을 가졌다. 

 

오페레타(operetta)의 탄생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현대 뮤지컬은 브로드웨이의 아메리칸 뮤지컬이다. 초기 미국 뮤지컬을 형성한 장르로는 오페레타, 민스트럴쇼, 보드빌, 레뷔, 벌레스크와 같은 미국의 자생적 오락물, 재즈 등이 있다. 오페레타의 기원을 말하기 위해, 고대 그리스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데, 원래 초기 공연 예술은 음악극이자 무용극이며 가면극 형태였다. 기원전 429년 소포클레스가 <오이디푸스 왕>을 썼던 시기에, 아테네에서는 봄마다 디오니소스 축제가 성행했다. 연극의 신, 술의 신, 풍요의 신인 디오니소스를 기리기 위해 사람들은 찬송가 디시램(Dythyramb)을 불렀다. 이때 코러스장이자, 인류 최초의 배우였던 데스피스(Thespis)가 앞에 나와, 역할을 수행하며 연기를 했다. 이것이 서양 연극의 기원이다. 
로마 제국에서 유대인들이 오랫동안 탄압받았지만, 380년 테오도시우스 1세가 테살로니카 칙령을 선포하면서, 기독교는 로마의 국교가 된다. 1453년 동로마가 멸망할 때까지, 기독교 이전의 인류 문명은 이단과 우상 숭배로 치부되었다. 성경은 라틴어와 같이 어려운 언어로 만들어져, 아무나 읽지 못했다. 종교 지도자들은 정치 세력과 결탁해 성경을 왜곡했다. 그러한 천 년의 암흑기를 지나, 14세기 말 르네상스가 도래했다. 기술과 교육이 발전하고 성경이 각국 언어로 번역되면서, 16세기까지 유럽 사회에서는 종교개혁과 함께 찬란했던 그리스·로마 문명을 그리워하는 문예부흥운동이 일어났다. 시각 미술, 문학, 음악 등이 변화를 맞이하면서 종합예술인 공연 또한 발전을 이뤘다. 화성법을 적용한 새로운 음악이 생겼고, 금기시됐던 고문서들에서 찬란한 역사와 아름다운 서사시들이 발견됐다. 예술 후원자인 지오반니 데 바르디(Giovanni de Bardi) 백작의 살롱에는 이를 활용해 종합공연을 만들어보려는 학자·시인·작곡가 그룹, 카메라타(Camerata)가 드나들었다. 이들이 만든 것이 ‘음악으로 표현된 작품들’, 즉 피렌체의 오페라(Opera de Musica)다. 
처음에는 서민적이었던 오페라가 고급예술화되면서 길고 지루해졌다. 19세기 독일 출신 프랑스 작곡가 자크 오펜바흐(Jacques Offenbach)는 <지옥의 오르페우스>, <호프만의 이야기>와 같은 100여 개의 ‘작은 오페라’(오페레타)를 썼다. 이 작품들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영국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영국 작가 윌리엄 슈벵크 길버트(William Schwenck Gilbert)와 작곡가 아더 시모어 설리반(Arthur Seymour Sullivan)이 오페레타 창작 파트너가 된다. 이들은 영어로 된 오페레타를 써서 대박을 터트렸다. 셰익스피어의 나라 영국에서는 연극적 유산이 강하게 남아있었기 때문에, 유행가가 들어간 영국 오페레타에서 배우들은 자유롭게 말을 했다. 이즈음 아메리카 대륙에도 유럽의 오페레타 문화가 들어왔다. 

 

아메리칸 뮤지컬의 발전
미국의 가수이자 작곡가, 극작가, 연출가. 배우였던 조지 M. 코핸(George M. Cohan 1878-1942)이 아메리칸 뮤지컬을 만들어낸다. 그는 미국 문화의 자존심으로 불리며, 그를 본딴 동상이 현재 타임스퀘어 광장에 우뚝 서 있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서구 사회의 변방 국가였던 미국이 경제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성장하기 시작했다. 특히 재즈 뮤지컬이 자리를 잡았고, 버라이어티 쇼가 발전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노래하는 오페라와 달리, 뮤지컬은 말과 노래가 혼재돼 있다. 이러한 형식적 간극은 파편적인 쇼였던 미국의 자생적 오락물들에서 기인한다. 
1927년에는 서사와 기승전결이 있는 최초의 북 뮤지컬 <쇼보트>가 발표됐다. 제롬 컨이 작곡하고, 오스카 해머스타인 2세가 작사한 작품이다. 해머스타인은 이후 리차드 로저스(Richard Rodgers)를 만나 최고의 팀을 결성하고, <왕과 나> <사운드 오브 뮤직>과 같은 걸출한 작품들을 만들어냈다. 해머스타인은 훗날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의 가사를 쓴 스티븐 손드하임을 만나는데, 이때 청년 손드하임의 습작에 대해 혹독한 비평을 한다. 손드하임은 이 일화를 회상하며 “나는 그날 하루에 뮤지컬 작사를 다 배웠다”고 고백했다. 손드하임을 존경했던 작곡가 조나단 라슨(Jonathan Larson, 1885-1945)은 작업 파트너가 없어 객관적인 시각을 구하지 못했다. 이를 통해 예술가가 평가받는 것을 두려워해선 안 되며, 함께 시너지를 낼 수 있는 파트너십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950년대 무렵 가정마다 TV가 보급되면서, 뮤지컬의 황금기는 끝이 난다. 고성일 대표는 얼마 전 뮤지컬 진흥법을 만들기 위한 공청회에 참석했다. 2~3년 뒤에는 법 제도를 통해 창작자들이 더 나은 환경 속에서 작업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작업실과 공모전의 기회가 주어지더라도, 결국 작품을 써내야 하는 것은 자신이다. 예술가는 자신을 갈아서 작품을 만든다. 고성일 대표는 오늘 언급한 선배 예술가들의 장인 정신을 잊지 않고, 동시대 창작자들이 그들의 후예라는 것에 자부심을 갖길 바라면서 강연을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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